이봉창 의사 연보

  • 1901. 08. 10 京城府 龍山區 元町 二丁目 (경성부 용산구 원정 이정목,지금의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 번지 불상 3통 3반에서 아버지 李鎭球 (이진구), 어머지 孫(손)씨 사이에 세 아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나다. 본적은 京城府 龍山區 錦町(경성부 용산구 금정)118번지, 지금의 서울 龍山區 孝昌洞 ( 용산구 효창동)
  • 1908 錦町(금정, 지금의 효창동)에 있는 서당에서 3년간 한문 공부하다.
  • 1911. 04 龍山區 靑葉町 (용산구 청엽정, 지금의 청파동)의 4년제 소학교 文昌學校(문창학교, 天道敎(천도교)에서 설립에 입학하다.
  • 1915. 03 위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빈한한 가정형편상 龍山區 元町 二丁目(용산구 원정 이정목)의 일본인 과자점 和田衛生堂(화전위생당)에 점원으로 취직하다.
  • 1917 龍山區 漢江通(용산구 한강통, 지금의 한강로) 16번지의 村田(촌전)약국 점원으로 전직하다.
  • 1919. 08 龍山驛(용산역)의 試傭夫(시용부)로 전직하다.
  • 1920. 01. 16 驛夫(역부)로 승진하다.
  • 1920. 02. 04 轉轍手(전철수)로 승진하다.
  • 1920. 10. 01 連結手(연결수)로 승진하다. 1년 후부터 승급과 급여 및 상여금에서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크게 뒤떨어지는 차별대우를 받기 시작, 식민지 민족의 비애를 맛보다.
  • 1924. 04. 14 신병을 이유로 龍山驛(용산역) 사직하다.
  • 1924. 09 錦町靑年會(금정청년회)를 조직, 幹事(간사)를 맡아 하수도 청소, 夜警(야경), 關帝廟(관제묘) 보존 등 공공 봉사활동을 펴다.
  • 1925. 09 임시 국세조사원으로 근무하다.
  • 1925. 11 조카딸 銀任(은임)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가다. 취직자리를 찾아 다니면서 韓國人(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여러번 차별대우를 경험하며 反日感情(반일감정)을 품기 시작하다.
  • 1926. 02 오사카 가스회사에 취직. 이때부터 木下昌藏 (목하창장, 기노시타 마사조)이라는 日本(일본)이름을 쓰다.
  • 1926. 09 영양실조로 각기병에 걸려 兵庫懸 城崎郡 三江村 下宮(병고현 성기군 삼강촌 하궁)에 사는 친구 小西升次郎(소서승차낭)집에서 5개월 요양하다.
  • 1927. 05 오사카 가스회사에 복직하다
  • 1927. 12 위 회사 경리담당 직원이 일거리를 잘 주지않아 사직하다.
  • 1928 住友伸銅所 尼ケ崎 (주우신동소 니마기)출장소에 常傭人夫(상용인부)로 취직하다. 직공모집에 응모하려 했으나 組長(조장)의 추천 거부로 무산, 다시 한번 차별을 실감.
  • 1928. 11. 07 天皇卽位式 (천황즉위식) 참관하려고 京都(경도)에 갔다가 한글로 쓴 편지를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검속되어 9일간 구류되다.反日感情(반일감정) 더욱 고조하다.
  • 1928. 12 검속을 이유로 주변의 차가운 시선에 못 견디어 住友伸銅所(주우신동소) 사직하다.
  • 1929. 02 오사카 山野 (산야)비누상회에 일본인으로 변신하여 취직, 이때부터 2년간 일본인 행세하다.
  • 1929. 09 위 상회 무단 사직하다.
  • 1929. 10 東京(동경)으로 가 여러 곳 전전하다.
  • 1930. 03 東京(동경) 坂口(판구) 해산물 도매상점에 취직하다.
  • 1930. 07 위 상점 사직하다.
  • 1930. 08 東京(동경) 大木(대목) 가방상점에 외판원으로 취직하다.
  • 1930. 11 위 상점 무단 사직하고 오사카로 가다. 이곳에서 친구 朴泰山(박태산)을 만나 그에게서 “上海(상해) 영국 전차회사가 한국인을 우대하며 임시정부가 한국인을 도와준다”는 말을 듣고 上海 (상해)에 가기로 결심하다.
  • 1930. 08 東京(동경) 大木(대목) 가방상점에 외판원으로 취직하다.
  • 1930. 12. 06 오사카 築港(축항)에서 上海(상해) 笠置丸(입치환)에 승선하다.
  • 1930. 12. 10 上海(상해) 상륙하다.
  • 1931. 01 大韓民國臨時政府(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방문해 金九(김구) (白貞善(백정선))과 첫 대면하다. 영국 전차회사에 취직 부탁했으나 영어, 중국어 못해 취직 단념.
  • 1931. 03 明華(명화)철공소에 취직. 두번째 金九(김구)와 만나 日本(일본) 국내사정에 관해 이야기 나누다.
  • 1931. 04 세번째 金九(김구)와 만나 천황살해의 의의에 대해 논의하다.
  • 1931. 05 金九(김구)를 만나 독립투쟁에 관해 논의하는 가운데 “폭탄을 구해주면 日本(일본)에 가 거사하겠다”고 밝히자 金九(김구)는 “ 결심이 확고하다면 내가 후원자가 되어 폭탄을 구해주겠다”고 답변, 양자 사이에 의기 투합하다.
  • 1931. 09 악기상점인 榮昌公司(영창공사)로 직장을 옮기다. 金九(김구)를 만나 폭탄 입수 독촉하자 金九(김구)는 이봉창 의사의 결심을 확인하면서 폭탄은 물론 거사비용도 마련하겠다고 밝히다.
  • 1931. 12. 13 金九(김구)를 만나 러시아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金九(김구)에게서 거사자금으로 중국 돈 3백불을 받고 사진관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손에는 2개의 수류탄을 들고 가슴에 ‘일본천황 살해를 맹세’하는 선서문을 달고 사진을 촬영하여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에 제 1호로 가입하다.
  • 1931. 12. 15 金九(김구)와 만나 중국 음식점에서 저녁먹고 中興(중흥)여관에 투숙하여 수류탄 사용법을 배우고 의거결행 일시와 장소에 관해 논의했으나 모두 이봉창 의사에게 맡기기로 하다.
  • 1931. 12. 16 金九 (김구)와 만나 다른 중국 음식점에서 저녁 먹은 후 시계점으로 가 金九(김구)에게서 8원 80전의 시계를 사 받고 中興(중흥)여관에 투숙하여 수류탄 운반방법을 배우고 이력서를 작성하여 金九(김구)에게 제출하다.
  • 1931. 12. 17 아침에 金九 (김구)와 狀元縷(상원루)에서 의거성공기원 축배를 들고 사진관에서 기념사진 찍고 이별의 악수를 나눈 뒤 헤어져 오후 3시 日本(일본) 伸戶(신호)행 우편선 氷川丸(빙천환)에 승선, 日本(일본)을 향해 上海(상해)를 떠나다.
  • 1931. 12. 19 일본 神戶(신호)에 상륙, 전차로 오사카에 도착하여 梅ノ屋(매별옥) 여관에 투숙.
  • 1931. 12. 22 오사카역에서 燕(연)호 열차로 東京(동경)에 도착, 淺草(천초)의 尾張屋(미장옥) 여관에 투숙.
  • 1931. 12. 23 金九(김구)에게 1백원의 송금을 요청하는 전보 치다.
  • 1931. 12. 28 새해 1월 8일 代代木(대대목) 연병장에서 육군 始觀兵式(시관병식)이 열리며, 觀兵式(관병식)에 天皇(천황)이 참석한다는 (朝日新聞(조일신문) 기사를 읽고 이날을 의거결행일로 정하다. 尾張屋(미장옥) 여관에서 수류탄을 언제든지 던지면 폭발하도록 손질하다.
  • 1932. 01. 04 金九(김구)가 송금한 1백원을 받다. 金九(김구)에게 “상품은 1월 8일에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고 의거결행일을 알리다.
  • 1932. 01 金九(김구), 臨時政府(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이봉창 의사의 의거계획을 보고하다 .
  • 1932. 01. 06 오전에 始觀兵式(시관병식)이 열릴 代代木(대대목) 연병장을 사전 답사하러 가는길에 거사결행에 큰 도움을 준 大場全奎(대장전규)헌병의 명함 입수. 代代木(대대목) 연병장은 답사한 결과 연병장이 넓어 천황 접근이 어렵다고 판단, 거사 예정장소에서 제외하고 原宿(원숙)을 거사장소로 정하다. 오후에 숙소를 尾張屋(미장옥)여관에서 朝日(조일)호텔로 이전.
  • 1932. 01. 07 오후 5시 반경 수류탄이 든 보따리를 들고 神奈川縣 川騎(신내천현 천기)의 유곽 玉木樓(옥목루)에 투숙하다. 기녀 靜枝(정지)에게 “내일 비가 오면 천천히 깨워도 되지만 날씨가 맑으면 7시에 깨워달라”고 부탁하고 잠들다.
  • 1932. 01. 08 날씨 맑음. 아침 7시에 기상. 8시에 수류탄 보따리 들고 玉木樓(옥목루)를 나와 국철 타고 거사 예정지인 東京(동경) 原宿(원숙)역에 내리다. 그러나 이곳의 경찰 경비가 삼엄해 거사장소를 赤坂見附(적판견부)로 변경했는데 이곳은 시간이 맞지 않아 마침 만난 택시로 경시청 근처까지 가다. 그 곳에서 大場(대장)헌병의 명함을 보여주고 경시청 현관 앞길까지가 마침 지나가는 천황 행렬에 수류탄을 던지다. 수류탄은 폭발했으나 그 위력이 약하고 착각으로 인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내외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다. 이봉창 의사는 자신이 결행했다고 밝히고 스스로 체포되다. 9번의 예심 가운데 첫 번의 예심조사 받다.
  • 1932. 01. 09 日本(일본) 신문들 이봉창 의사 의거를 호외로 보도하면서 주로 천황의 무사함에 초첨 맞추다. 중국 신문은 이날부터 11월까지 31개紙(지)가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높이 평가하고日本(일본)과 日本皇室(일본황실)을 폄하하는 기사를 보도했으며 이에 대해 日帝(일제)가 탄압을 가해 中國(중국)언론이 수난을 겪다. 韓國獨立黨(한국독립당), 이봉창 의사 의거에 관한 성명 발표하다. 이봉창 의사 豊多摩(풍다마) 형무소에 수감되다. 수류탄은 폭발했으나 그 위력이 약하고 착각으로 인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내외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다. 이봉창 의사는 자신이 결행했다고 밝히고 스스로 체포되다. 9번의 예심 가운데 첫 번의 예심조사 받다.
  • 1932. 01. 10 豊多摩(풍다마) 형무소에서 ‘聽取書(청취서)’진술하다. 韓國獨立黨(한국독립당)은 이봉창 의사의 의거에 즈음한 韓國獨立黨宣言(한국독립당선언)을 발표하다.
  • 1932. 01. 11 豊多摩(풍다마)형무소에서 제2회 신문받다.
  • 1932. 01. 12 豊多摩(풍다마) 형무소에서 제3회 신문받다. 東京 擎視廳長 長挻演(동경 경시청장 장연연) 해임되고 후임에 東京府知事 長谷川久一(동경부지사 장곡천구일) 임명되다.
  • 1932. 01. 13 豊多摩(풍다마)형무소에서 ‘上申書(상신서)’ 진술하다.
  • 1932. 01. 16 長挻演(장연연) 징계 면직되고 경시청 경무부장 등 7명 감봉 처분 받다.
  • 1932. 01. 20 육군 헌병사령관 중장 外山豊造(외산풍조)등 6명 징계처분 받다.
  • 1932. 01. 21 日本(일본) 사법성 金九(김구) 체포수사를 위해 龜山愼一(구산신일)검사를 上海(상해)에 파견, 수사가 여의치 않자 1개월 후 귀국하다.
  • 1932. 01. 28 豊多摩(풍다마)형무소에서 제4회 신문받다.
  • 1932. 02. 09 豊多摩(풍다마)형무소에서 제5회 신문받다.
  • 1932. 02. 12 豊多摩(풍다마)형무소에서 제6회 신문받다.
  • 1932. 02. 13 豊多摩(풍다마)형무소에서 제7회 신문받다.
  • 1932. 03. 11 東京地方裁判所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제8회 신문받다.
  • 1932. 03. 18 金九(김구) 체포수사 위해 2명의 검사上海(상해) 재파견하다.
  • 1932. 06. 27 豊多摩(풍다마)형무소에서 제9회 신문받다.
  • 1932. 09. 09 대심원 제2 특별형사부 법정에서 공판 준비 신문받다.
  • 1932. 09. 15 大阪府 知事 齊藤宗宜(대판부 지사 제등종의)등 10명 견책처분 받다.
  • 1932. 09. 16 대심원 법정에서 대심원장 和仁貞吉(화인정길)을 재판장으로 한 이봉창 의사에 대한 첫 공판이 비공개 속에 열려 사형을 구형하다.
  • 1932. 09. 28 金九(김구), 이봉창 의사에 대한 사형선고를 앞두고 이봉창 의사의 생애와 의거와 관련한 장문의 (東京炸案(동경작안)의 眞狀(진상)>을 발표하다.
  • 1932. 09. 30 日本(일본) 대심원, 두번째 공판을 열고 이봉창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다. 같은 시간에 사법성은 이봉창 의사 의거에 관한 ‘사건개요’를 발표하다.
  • 1932. 10. 10 오전 9시 2분 市ケ谷(시마곡)형무소에서 이봉창 의사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시다. 이봉창 의사 생애 31년 2개월. 시신은 東京(동경) 서북 쪽 멀지 않은 琦玉縣 浦和市 浦和(기옥현 포화시 포화)형무소 묘지에 매장되다.
  • 1932. 10. 15 上海(상해)의 (申江日報(신강일보)와 南京(남경)의 (中央日報(중앙일보)는 金九(김구)의 (東京炸案之眞狀(동경작안지진상)>을 보도하다. 民團(민단)은 이날 아침 6시 英 租界(영 조계)의 모 사원에서 이봉창 의사 추도식을 거행하다.
  • 1945. 12. 23 서울 운동장에서 이봉창 의사 등 순국선열 추념대회가 金九(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다. 金九(김구)는 日本(일본)의 朴烈(박열)에게 이봉창 의사를 비롯한 尹奉吉(윤봉길), 白貞基 (백정기) 의사 유해의 한국 봉환을 의뢰하다.
  • 1946. 02. 19 東京 神田共立講堂(동경 신전공립강당)에서 이봉창 의사를 비롯한 尹(윤), 白(백) 세 의사의 유해 봉환회가 열리다.
  • 1946. 04. 20 이봉창 의사를 비롯한 세 의사 유해 등이 東京(동경) 유골봉안회장 徐相漢(서상한)등에 의해 東京(동경)을 출발, 귀국길에 오르다.
  • 1946. 05. 15 이봉창 의사 유해 등은 日本(일본) 關西(관서)지방을 거쳐 玄海灘(현해탄)을 건너 釜山(부산)으로 無言(무언)의 還國(환국)을 하다.
  • 1946. 06. 15 釜山(부산)공설운동장에서 金九(김구)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한 5만 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회 열리다.
  • 1946. 06. 16 이봉창 의사 유해 등 釜山(부산)역에서 ‘해방호’ 열차편으로 서울에 도착, 太古寺(태고사)에 안치되다. 李承晩(이승만)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간단한 安慰式(안위식)이 거행되다. 太古寺(태고사)에는 연일 연령 참배자가 줄을 잇다.
  • 1946. 06. 30 이날 거행될 예정이였던 이봉창 의사를 비롯한 세 의사의 國民葬(국민장)이 연일 쏟아지는 장마로 인해 7월 6일로 연기되다.
  • 1946. 07. 04 金九(김구), 귀국 후 첫 성명 “同胞(동포)에게 告(고)함”에서 이봉창 의사와 尹(윤)의사에 관해 언급하다.
  • 1946. 07. 06 이봉창 의사를 비롯한 세 의사의 國民葬(국민장)이 金九(김구),李承晩(이승만), 李始榮(이시영), 呂運亨(여운형) 등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되어 오후 3시 하관 입토하고 끝나다.
  • 1962. 03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다.
  • 1962. 11. 06 이봉창 의사 동상, 효창공원에 세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