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의사 기념사업

이봉창 의사

  • 독립운동가 이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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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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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과 성장
  • 민족 차별에 눈을 뜨다
  • 싹트는 항일 의식
  •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이 되다
  • 의거와 그 영향
  • 상훈과 추모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그 영향 선서식을 마친 뒤 이봉창은 12월 17일 일본으로 향하였다. 12월 19일 밤 고베(神戶)항에 도착한 뒤 오사카를 거쳐 22일 동경에 도착하였고, 이후 근처의 여관에 머물면서 이봉창은 일왕 폭살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2월 28일 신문에서 일왕이 1932년 1월 8일 동경 교외의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육군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기사를 보고, 그 날을 거사일로 계획하였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수류탄의 위력이 약했고, 또 명중을 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 정계가 크게 동요했으며 다수의 경호 관련자가 문책당하였다. 이후 그는 토요다마 형무소에 수감되어 그 해 9월 30일 재판에 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당시 일본은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침략을 본격화 했으며, 1931년 7월 2일에 발생한 만보산(萬寶山)사건을 크게 확대하여 한국인과 중국인의 민족간 반목을 조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기관지인 <<국민일보>> 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 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항일 정신을 대변하여 주었다. 또한 이봉창 의사 의거 이후 만보산 사건으로 인한 한중 민족간의 감정 대립 이 크게 완화되었으며, 중국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적지 않은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당시 활동이 부진했던 임시정부는 활기를 되찾았으며, 독립운 동자금의 모금도 활발해 졌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윤봉길 의사 의거를 비롯한 항일투쟁의 도화선이 되어 훗날 광복군 창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