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의사 기념사업

이봉창 의사

  • 독립운동가 이봉창
  • 이봉창 의사 연보

이봉창 의사 연보

HOME > 이봉창 의사 > 독립운동가 이봉창
  • 출생과 성장
  • 민족 차별에 눈을 뜨다
  • 싹트는 항일 의식
  •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이 되다
  • 의거와 그 영향
  • 상훈과 추모
평범한 삶에서 민족 차별에 눈을 뜨다 이봉창은 1919년 당시 생계를 꾸리느라 3.1 운동 등 항일독립운동에 직접 참여 하지 못했으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일본이 내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의 헛된 실상을 뼈아프게 느꼈다. 용산역에서 일을 시작한지 1년쯤 됐을 때부터 승급과 봉급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래서 1924년 4월 사진원을 제출하고, 그 해 9월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간사를 맡아 공공 봉사활동을 벌였다. 1925년 11월 이봉창은 조카딸의 도움으로 경성을 떠나 오사카(大阪)로 향하면서 국내보다 더 나은 사회적 환경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 업은 쉽지 않았고, 천신만고 끝에 1926년 2월 오사카 가스회사에 취직을 했다. 이때부터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는 관례를 따라, 이봉창이라는 이름 대신 기노시타 마사조(木下昌藏)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하였다. 이봉창이란 이름으로 일할 때와 기노시타 마사조라는 일본 이름으로 일할 때의 임금과 승급 등에 차별이 매우 분명했으며, 심지어 가스회사를 그만둔 뒤 부두노동자로 힘든 막일을 할 때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은 더욱 뚜렸했다.